우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자유와 민주 그냥 오지는 않았습니다.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5.18 민주화 운동의 배경과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혀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광주 시민과 전라 도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보안 사령관 및 12·12 사태를 발생시킨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입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킵니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습니다.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폭동적 시위진압 방식을 고수하였고,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처형을 하고 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까지 대대적으로 탄압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신군부에게 철저히 진압됐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면서 잠깐이나마 민주화 운동의 바람이 불었던 ‘서울의 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서울의 봄도 짧은 계절의 봄처럼 끝나게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배경과 역사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이른바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유신체제를 벗어나 민주사회를 이루려는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5.18 민주화 운동을 을 강경진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서울역 회군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중단된 서울과는 달리 광주에선 5월 16일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서울 지역 30개 대학 학생 10만 명이 모여 전두환 신군부에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군 투입 소식이 알려지면서 자진 해산한 사건.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습니다.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던 전남대생 200여 명이 계엄군에 의해 출입이 저지되자 거세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계엄군은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교내를 벗어나 광주 시내로 진입하면서 강력한 시위 진압을 전개했습니다. 시위 진압은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폭행을 가하는 등 그야말로 무차별, 비인격적 형태였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힘을 모아 시민 군을 결성해 계엄군에 맞섰습니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자, 길거리는 화약 냄새와 피로 얼룩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언론과 외부를 연결하는 시외전화를 모두 두절시켰으며,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군인에게 짓밟힐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에서 이 같은 처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목숨을 바치고자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몰려들면서 계엄군이 한때 퇴각하기도 했지만 5월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계엄군의 총공세에 시민들은 결국 진압당하고 맙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그날
무수히 많은 사망자와 희생자를 내며 열흘에 걸친 5.18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88년 제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정식 규정되게 되었고, 1997년에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의미를 높이 평가받아 5월 18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되게 되었습니다.
5. 18일 민주화 운동은 현재도 많은 광주 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상처입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이자 위대한 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망하게 떠난 아들을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어머니와 오월의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고, 어렵게 살아남은 그들에게 5·18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 방문하기 좋은 역사 장소
(1)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3개의 상설 전시실을 통해 5.18 민주화 운동의 일자별 전개 과정을 사진과 영상기록물 등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알아볼 수 있고, 5.18 민주화 운동의 기록물이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2) 5‧18 자유공원: 자유공원은 5.18 당시 군사재판 현장이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의 원형을 복원, 재현한 장소입니다. 각각의 장소마다 시민들이 취조받거나 연행되어 가는 모습이 마네킹 모형으로 연출되어 있어 당시의 공포스러웠던 상황을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3) 국립아시아 문화 전당(옛 전남도청) : 상무관, 전일빌딩 245, 분수대와 시계탑 광주에 가볼 만한 곳 중 하나인 옛 전남도청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마지막 공방지가 되었던 어두운 역사적 장소입니다. 전남도청에는 민주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체육관인 ‘상무관’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4) 도청 앞 5.18 광장: 사진으로 많이 보았던 시민들의 집결지, 분수대가 그대로 자리해 있습니다. 분수대 옆에는 5.18 시계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매일 오후 5시 18분이 되면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시계탑에서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5) 옛 전남도청 맞은편에는 민주항쟁 사적 28호인 ‘전일빌딩’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건물의 특별한 점은 9층과 10층에서 당시 계엄군이 쏟아부은 총탄 흔적이 건물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 남아있는 245개의 탄흔은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에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하신 분들을 깊이 기리며, 현재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감사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역사와 자유를 향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 배경과 역사,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그날, 기념일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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